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 많은 것과 군대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인인 나의 삶과 민간인의 삶은 너무나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해 14년간이나 군복무를 하고 갑자기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서는 꺼내기 힘들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가 행크를 통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지난,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쳇바퀴 돌듯 10년을 하루처럼 살아온 “당신의 ‘업’을 위한 UP”

고등학교 졸업 2달 만에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집안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기에 장남인 나는 대학보다 직장을 택해야 했다. 외사촌 형과 이모부가 직업군인인 영향도 있었다.

“해야 하고, 하고 있고, 할 수 있다.” 군생활 내내 스스로 되뇌었던 말이다.

그렇게 14년간 육군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반년간 눈이 녹지 않는 전방에서도, 여름엔 40도에 범접하는 지역에서도 근무했다. 10년간은 신교대 소대장으로 일했다.

성실했던 덕분인지 집안형편은 20년 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동생마저 직업군인으로 생활하고 있음에도 가정형편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직업군인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재테크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주변사람들처럼 열심히 저축했고, 서른이 지나며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후 3년간 미국 우량주에만 투자해 약간의 이익을 봤지만 그뿐. 서른이 넘어 전역한 내게 남은 자산은 겨우 전세방 하나 구할 수준이었다.

재테크, 손노동, 기술직, 전자책, 배달업 등을 알아봤다. 본격적으로 하나, 둘 직접 해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정말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송사무장님을 만났다.

영상 속 사무장님은 다른 유투버들과는 달랐다. 본인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감 없이 본인의 출신과 소신을 밝혔다. 다른 투자자들과는 전혀 달라보였다. 진심이 느껴졌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첫 강의로 경매의기술CLASS를 수강했다.

간절함과 진심이 닿았을까. 가입한지 얼마 안 된 내가 서포터즈 면접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리고 송사무장님을 직접 뵐 수 있었다.

일반적인 면접은 팽팽한 긴장만 감돌지만, 행크에서만큼은 ‘격려’가 함께한다. 카페에서 친해지고 격려하던 분들을 직접 만나고 큰 에너지와 감동을 느꼈다.


행크 서포터즈 면접에서

그 한번의 모임 경험이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열정에 불을 붙였다. 매일 글과 댓글로 소통하고, 스터디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며 어느새 나는 행며들고 있었다.

이후 내 일과는 단순해졌다. 지혜로의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임장을 가고, 카페를 보고. 조급해하지 않으려 했다.

해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다.

연이은 패찰과 높은 낙찰가에 좌절하기도 했다. ‘좋은 물건은 대체 어디에 있길래, 나만 안보이는거지?’라며 불안할 때도 있었지만, 아직 덜 성장했음을 자각했다.

나는 하루 종일 행크에 머물렀다. 그다지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이지만, 열정과 체력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쟤 진짜 제정신 아니다, 진짜 미쳤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나는 경매에 미치고 싶다. 그리고 많은 행크 선배분들처럼 EXIT하고 싶다.

단지 그 뿐이다. 이를 위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행크에서 배우고 인맥을 만드는 것임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행복재테크 각종 이벤트 현장

행크엔 모든 것이 있다. 사람, 인맥, 경험, 노하우, 실무지식, 지혜, 체계적인 교육시스템.

그리고 그 무엇보다 모두가 한 가지 목표를 향하고 있다. EXIT. 그 강력한 일념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을 군 생활과 송사무장님의 책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최근 친구들을 만나러 고향을 다녀왔다. 다음날엔 전 직장(군부대)을 방문했다.

이상하게도 친구들이 날 호칭하는 것이 어색했다. 다음날 방문했던 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엑시트 스터디를 듣고, 반드시 경제적 자유(EXIT)를 이루겠다고 다짐했고, 저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이제는 저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부동산 공부를 하지 않는)친구들, 옛 직장동료와는 말도 통하지 않고 재미도 없다. 관심사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행크 가족 분들과 강사님들의 ‘업님’이란 호칭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럽다.

단 1년, 김상사는 이렇게 행크의 모든 행사에 가장 앞장서서 오른쪽 현수막을 드는 ‘업님’으로 성장했다.




위 경험담은 2023,2024년 게재된 ‘Up을위한업’님의
‘Before&After 여러편’을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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