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대학로에서 ‘굴레방다리의 소극’이라는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빈민촌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자신들의 가족사를 끝없이 연극으로 재연하는 내용으로, 고립된 공간에 갇혀 사는 이들의 인생이 돌고 돌고 도는 모습에 ‘찝찝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기생충 동네가 사장님 동네로 천지개벽한 100년 이야기 [여기어때?]
‘굴레방다리의 소극’ 공연장면

관계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몇 가지 물었더니 글쎄 굴레방다리라는 지명이 실제로 있는 곳이랍니다.

‘그럼 그 동네도 이런 느낌이려나’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영화 한편이 세계적인 작품으로 떠오르자 덩달아 굴레방다리 동네가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하는데…

그렇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입니다. 굴레방다리는 지금의 지하철 2호선 아현역 자리, 지금은 복개된 하천 사이를 잇는 다리였고요.

마포의 대장이라 불리는 마포래미안푸르지오가 이 동네라면 뭔가 꼬이는 느낌이죠?

이게 대체 어떻게 이렇게 된 일인지, 실타래를 한줄 한줄 풀어보겠습니다.

아현=애오개의 놀라운 비밀
요즘이야 도로가 워낙 잘 뚫려서 ‘고개’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지만, 서울 도성 서쪽에는 큰 고개가 두 곳이나 있었습니다.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가는 길목인 대현, 서울역 서쪽에서 공덕역으로 가는 길목인 만리재입니다.

자차로 이동하다 보면 대현고개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만리재를 넘어보면 ‘아니 무슨 서울역 앞에 무슨 이런 언덕이 있냐…’하게 되죠.

이들 사이에 아담한 고개가 하나 있습니다. 마포에서 종로·서울역 방향으로 이동할 때 종근당 앞에서 ‘살~짝 언덕이네?’ 싶은데, 아님 아현동 가구거리? 맞아요 바로 이곳. 이곳이 애고개, 즉 아현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언덕’임을 느낄 수 있는 아현동→종로(서울역) 가는 길

옛날 만리재가 너무 길고 높아 도성에서 마포나루로 가려면 오래 걸리니까 그보다 작은 아현을 많이 이용했는데, 그래서 만리재를 큰고개 아현을 아이만큼 작은 고개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애고개가 애오개도 되고 한자로 아현(兒峴)이라 불리다 지금의 아현(阿峴)이 되었다는 설이죠.

다른 설은 과거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서소문 밖에 주로 매장했는데, 이곳이 아이들을 묻는 지역이라 애고개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동네에 오래 살고 계신 분들만 하는 이야기로, 여우가 살던 여우고개도 있었다는데. 아현동 656번지, 지금의 마포더클래시 북쪽 언덕을 이야기합니다.

아현동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신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는데, 환자들과 오갈 데 없는 유랑민들을 거두어 치료하고 먹이는 복지기관과 병원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혜민서를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혜민서가 서민들의 치료기관이었다면 활인서는 그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공동묘지에, 빈민구제기관(서활인서-현재 아현중학교)에, 일제강점기 감옥(경성감옥-현재 서부지법), 분뇨처리시설까지 있었으니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역 아니었나 추측해봅니다.

일제강점기 전후, 판자촌+달동네
아현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일제는 서울로 들어오는 도시빈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곳 중 하나가 아현이었습니다.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아현은 피난 온 사람들과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에 서울의 산업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까지 몰리면서 골목은 좁아지고 집은 빼곡해졌습니다. 달동네가 되어버렸죠.

이 과정에서 지금의 아현역 남쪽 아현시장도 규모가 불어났는데, 1960년대에는 동대문·남대문·청량리 시장과 더불어 김장시장이 크게 열리는 곳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1960년대 아현동 김장시장

앞서 소개한 동대문 옆 창신동·숭인동의 모습과 비슷하죠.

아현동 개발 전 인터뷰를 보니 주민들은 동네를 ‘매우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며, 서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없이 살지만 시골인심이 살아있는 곳, 교통이 편리한 것이 큰 자랑거리라고 하는 분도 있었고,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물론 재개발이 된 지역에선 다 지난이야기, 아직 안 된 지역에선 현재진행형이겠죠.


1970년대 아현고가차도

간간히 새 연립도 생기고 이화여대와 인접한 곳은 넓은 단독주택 밀집지역도 생겨났지만, 아현동 일대 대다수의 집은 낡고 허름하고 저렴했습니다.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등장했지만, 꾸준히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94년 12월, 지금의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인근에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건물 145동과 차량 92대가 파손되고, 210세대의 이재민이 생길 만큼 여파가 상당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비슷한 시기(6개월 전) 발생한 사고였지만 대응은 많이 달랐는데요. 4년 만에 철거를 마치고 아파트(아크로비스타)를 지어 2004년 입주한 삼풍백화점과 달리, 아현동 사고현장은 뉴타운 바람이 불때까지 빈땅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뉴타운, 그리고 20년
사고가 발생한 자리를 비롯해 아현동 달동네가 개발다운 개발을 시작한 것은 강북 주민들의 염원 ‘뉴타운’이었습니다.

당시 뉴타운은 썩빌, 달동네, 우범지대, 유흥가 등으로 낙후된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지금의 모아타운이나 신통기획의 최소 10배쯤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2010년 아현동(현재 e편한세상신촌에서 공덕자이 방향)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2000년대 시작된 뉴타운은 익숙한 은평, 길음, 미아, 왕십리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서울시 자료를 찾아보면 아현역 북쪽 북아현뉴타운이 2차, 아현역 남쪽 아현뉴타운이 3차로 지정돼 20년 넘게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울 뉴타운 현황 / 자료=서울시

북아현뉴타운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자료=시사저널(이미지를 클릭하면 기사로 연결됩니다)

뉴타운 지정 후 구역이 잘게 쪼개지면서 가장 북쪽에 있던 충정로·냉천구역은 따로 재개발을 추진해 2011년 돈의문센트레빌이 되었습니다.

다른 구역도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도심접근성을 무기로 역세권 주변이 재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신촌 푸르지오, e편한세상 신촌, 힐스테이트 신촌이 2015년부터 차례로 준공됐습니다.

이제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2구역과 3구역이 남았는데 여전히 말이 많아서… 아무래도 2030년은 훌쩍 넘어야 천지개벽이 끝나지 않을까 합니다.


북아현뉴타운 철거장면 / 사진=서울신문(이미지를 클릭하면 기사로 연결됩니다)

재개발 후 신촌푸르지오, e편한세상신촌

이번엔 아현뉴타운을 살펴보겠습니다.

재개발이 상대적으로 빨랐던 구역과 더딘 구역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10년차를 넘어선 대장 마포래미안푸르지오(마래푸)부터 8년차 마포자이더센트리지, 5년차 마포프레스티지자이, 3년차 마포더클래시가 한데 뭉쳐 있죠.

마포래미안푸르지오(좌), 공덕자이(우) 철거직후 / 사진=민속박물관

마포래미안푸르지오 / 사진=삼성물산

아현뉴타운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애오개역을 경계로 동쪽 서울역까지의 구역도 이에 발맞춰 많은 아파트가 새로 들어섰습니다.

아현동가스폭발사고 자리는 2015년 공덕자이가 됐고, 마포센트럴아이파크, 서울역센트럴자이, 서울역한라비발디 등도 비슷한 시기 준공되었습니다.

최근 로또청약으로 뜨거웠던 마포자이힐스테이트라첼스가 공덕자이 바로 아래 위치합니다.


공덕자이 재개발 후 모습

달동네와 아파트숲의 경계
최근 아현동을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현시장, 그리고 옛 포장마차촌의 흔적, 하천 복개 구간이었습니다.(이런 곳이 은근 맛집이 많거든요)

언덕을 몇 번이나 넘나들며 “나는 공덕자이~!!(그만하면 평지)”를 부르짖기도 하고요.

한바퀴 돌아보고 내린 결론은 ‘입지적으로 아주 뛰어나다. 미래가치 있다’ 그리고 ‘이정도면 수익이 추억을 잡아먹을 만큼 올랐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재개발된 아파트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구역의 경계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마포래미안푸르지오 경계

e편한세상신촌 경계


현재 재건축 추진 중인 아현동 지역 / 자료=리치고

아현동에는 신축 아파트가 계속 공급될 것입니다. 광화문·종로가 코앞이고, 하나 더 언급하자면 인근 경희궁자이보다 을지로 접근성도 좋습니다.(을지로에도 좋은 회사가 많죠)

2호선과 5호선 모두 접근성이 좋다는 것은 절대적인 장점입니다. 서울역 서부권 개발계획도 있고, 많이들 이야기하는 언덕은 엘리베이터로 극복하면 됩니다.

현재 재개발 추진 중인 아현역부터 충정로역 사이 구역들의 개발이 끝나면 굴레방다리나 아현고가, 포장마차촌과 같은 추억 속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게 되겠죠.


최근 아현뉴타운 모습

그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동네 분위기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아현동 포장마차촌 ‘아포’ 대신 깨끗한 통학로만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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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PS. 아포는 현재 아현초등학교 후문 옆에 있던 포장마차촌을 말합니다.

하천을 복개한 자리를 쓰레기적치장으로 쓰고 있었는데, 1960년대 주민들이 리어카를 끌고 와 술과 음식을 팔던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1990년대엔 나무판자로 만든 노점으로, 1999년엔 컨테이너를 설치해 (과태료 내면서)장사를 계속했지만 엄연히 국공유지를 무단점거한 것이었죠.

아현뉴타운 재개발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입주를 시작한 시점인 2016년 강제철거되었습니다.



철거 전 아현동 포장마차거리

철거 후 최근 모습